놋그릇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생활 식기로 썼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구리는 어느 문명에나 있는 금속인데, 왜 밥그릇과 국그릇을 놋그릇으로 쓴 건 한국뿐일까요. 어릴 적 어머니가 재와 흙으로 놋그릇을 문지르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무겁고 손이 많이 가는 그릇을 왜 조상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겼는지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안성맞춤 유래, 알고 보면 장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사실 놋그릇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아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조선시대 경기도 안성은 유기(鍮器) 생산의 중심지였습니다. 유기란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금속기물로, 쉽게 말해 놋쇠로 빚어낸 그릇과 기물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안성의 장인들은 주문자가 원하는..
어릴 때 저희 집 마루 한쪽에는 커다란 나무궤짝이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뒤주였습니다. 그 안에는 쌀과 됫박이 들어 있었는데, 솔직히 쌀이 가득 찬 모습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뒤주를 미화하지 않고, 과거의 현실과 지금의 저장 기술을 함께 짚어보려 합니다. 뒤주가 집안에서 차지했던 자리와 그 배경 뒤주는 소나무나 참나무 같은 경질 목재(硬質木材)로 짜 만든 곡식 저장함입니다. 경질 목재란 밀도가 높고 단단해 외부 충격과 습기에 비교적 강한 나무를 뜻합니다. 위쪽 뚜껑으로 쌀을 채우고, 아랫부분에 달린 출구에서 필요한 만큼만 꺼내 쓰는 구조, 즉 중력식 선입선출(先入先出) 방식으로 설계된 것이 특징입니다. 선입선출이란 먼저 넣은 곡식이 먼저 소비되도록 유도하는 원리로, 오래된 쌀..
맷돌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 수천 년을 이어온 압착식(壓搾式) 곡물 분쇄 도구입니다. 제가 어릴 때 직접 돌렸던 그 무거운 돌덩이가 사실은 현대 믹서기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정교한 원리를 품고 있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석기시대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린 시절 집 안에는 돌로 만든 도구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맷돌, 절구, 다듬이판까지.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게 너무 당연한 풍경이었습니다. 어떤 집이나 마당 한켠이나 부엌 한쪽에 크고 납작한 돌 두 짝이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 중 절구(臼)와 맷돌은 어린 저도 직접 다룰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절구란 곡식이나 재료를 공이로 찧어 분쇄하는 도구로, 약재나 참깨처럼 소량을 가공할 때 주로 썼습니다...
솔직히 저의 어릴 때 절구는 그냥 마당 한켠에 놓인 무거운 돌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무거운 돌 안에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절구와 공이는 단순한 조리도구가 아니라 수천 년 식문화를 이어온 생활 유산입니다. 마당 한켠의 돌덩어리, 그게 절구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머니 댁 마당에는 절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는 그냥 커다란 돌이었고, 오히려 장난감에 더 가까웠습니다. 오재미나 공을 멀리서 던져 절구 안에 넣는 게임을 혼자 하기도 했고, 작은 보물창고처럼 안에 뭔가를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수천 년 역사를 가진 도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절구의 역사를 따라가면 선사시대까지 거슬..
삼복더위가 시작되면 어디서든 삼계탕 줄이 길어집니다. 저는 사실 성인이 되어서야 삼계탕을 처음 먹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늘 닭백숙과 닭죽을 먹었거든요. 복날마다 솥 앞에 앉아 닭죽 냄새를 맡던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이 글이 제법 반갑게 읽힐 겁니다.복날과 보양식 유래 — 삼계탕은 언제부터였을까 무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를 삼복(三伏)이라고 부릅니다.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 초복·중복·말복으로 이어지는 이 기간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음양오행이란 자연의 모든 현상을 음(陰)과 양(陽), 그리고 목·화·토·금·수 다섯 가지 기운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동양 철학 체계입니다. 여름은 양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시기라 몸의 균형이 흔들리기 쉽고, 그 탓에 원기 회복을 위한 보양식이..
저는 칼국수도 좋아하지만 수제비를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데 칼국수 전문점은 많은데 수제비 전문점은 거의 없어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반드시 방문해서 먹곤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수한 수제비가 서민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수제비를 '운두병(雲頭餠)'이라 부르며 양반가 잔칫상에 올렸다고 나옵니다. 저도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꽤 놀랐습니다. 비 오는 날 허름한 분식집에서 먹던 그 수제비가, 한때 귀한 잔치 음식이었다니요. 수제비의 역사, 알고 보면 꽤 복잡합니다 수제비의 어원부터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손을 뜻하는 한자 '수(手)'와 '접는다'는 의미의 '접'이 합쳐져 '수접이'라 불리다가 오늘날의 수제비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이 단어가 정착된 셈인데,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