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 기사식당에서 우연히 먹은 제육볶음 한 그릇이 제 인생 음식 목록을 바꿔놨습니다. 냄비째 올라온 매콤한 양념의 돼지고기, 아삭한 채소, 그 조합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그 후로는 제육볶음을 먹기 위해 기사식당을 찾아 다닌 적도 많았습니다. 한국 남성들이 제육볶음을 유독 좋아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왜 이 음식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아 왔는지 직접 파고들어 봤습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제육볶음의 뿌리 제육볶음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됐다는 건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1670년경 안동 장씨가 집필한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야조육(野猪肉), 즉 멧돼지 고기를 활용한 조리법이 등장합니다. 음식디미방이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조리서로,..
불고기가 궁중 음식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제사상에나 올라오는 너비아니를 보면서 '저게 불고기의 조상이라고?' 싶었던 게 솔직한 첫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양까지 직접 내려가서 석쇠 위에 올라간 불고기 한 점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2,000년의 역사가 한꺼번에 연결되었습니다. 맥적에서 너비아니까지, 불고기의 뿌리 불고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시대의 맥적(貊炙)이라는 음식에 닿습니다. 맥적이란 고구려를 세운 맥족(貊族)이 즐겨 먹던 꼬챙이 구이로, 오늘날의 불고기와 결정적으로 같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굽기 전에 먼저 장(醬)에 재워두는 선 양념 후 조리 방식입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이 고기를 구운 뒤 소스를 찍어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이질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고려 시..
장충동 족발거리는 1959년, 이북 실향민들이 가져온 조리법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처음 족발을 먹어봤는데, 그 한 점이 고기에 대한 제 편견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비계라면 지금도 손을 못 대는 제가, 족발 껍질만큼은 거부감 없이 먹게 되더라고요. 오랜 역사를 품은 음식이 이렇게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유래부터 영양 성분, 그리고 독일의 족발이라 불리는 슈바인학센까지 비교해 정리해봤습니다.족발의 역사와 유래 — 장충동이 전부가 아니다 족발의 기록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조선 세종 연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돼지 다리를 삶아 먹는 '족두(足頭)'가 언급되고, 조선 후기 요리서인 『음식비방(飮食秘方)』에는 돼지 다리를 삶아 찹쌀풀에 찍어 먹는 족발 조림 ..
국밥이 그냥 밥을 국에 말아 먹는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시장 순대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한 끼가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가 한 뚝배기 안에 담긴 음식이라는 걸. 오늘은 국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왜 한국인이 이 음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짚어봅니다.국밥의 역사: 주막 주모가 만들어낸 전설의 끼니 국밥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까지 닿습니다. 당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보부상이 대거 등장했는데요. 보부상이란 조선 8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행상인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전국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주막 문화가 급격히 활성화됩니다.문제는 밥이었습니다. 국은 약한 불에 계속 끓이..
파전도 전이고 김치전도 전인데 왜 빈대떡만 '떡'일까요? 저도 어릴 때부터 이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부엌에서 지글지글 부쳐지는 빈대떡을 먹으면서도 "이게 왜 떡이지?" 하고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의문이 빈대떡의 어원을 파고들게 만들었고, 알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었습니다.이름 하나에 담긴 세 가지 어원 논쟁 빈대떡이 왜 '떡'인지 알려면 어원부터 짚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貧者)이 먹던 떡'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빈자(貧者)의 떡이 빈자떡 →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명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을 들여다보면 녹두는 단순한 서민 식재료가 아니었거..
김치를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이건 그냥 절인 채소잖아'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실 17세기 이전까지 김치는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채소절임이었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빨갛고 매콤하고 깊은 김치는 어떻게 탄생한 걸까요.채소절임에서 시작된 4천 년의 역사 김치의 출발점을 따라가면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와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냉장기술이 없던 시절, 채소를 소금물에 담가 보존성을 높이는 방식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선택한 해법이었습니다. 유럽의 피클, 중국의 저(菹), 그리고 한반도의 김치 조상 모두 같은 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삼투압 현상이란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수분이 이동하는 현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