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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 기사식당에서 우연히 먹은 제육볶음 한 그릇이 제 인생 음식 목록을 바꿔놨습니다. 냄비째 올라온 매콤한 양념 돼지고기, 아삭한 채소, 그 조합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한국 남성들이 제육볶음을 유독 좋아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왜 이 음식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아 왔는지 직접 파고들어 봤습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제육볶음의 뿌리
제육볶음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됐다는 건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1670년경 안동 장씨가 집필한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야조육(野猪肉), 즉 멧돼지 고기를 활용한 조리법이 등장합니다. 음식디미방이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조리서로, 당시 양반가 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입니다. 이 기록을 제육볶음의 직접적인 시초라고 단정하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리법의 형태나 양념 구성이 지금과 너무 달라서, 직계 조상이라기보다는 먼 친척 정도로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돼지 사육 자체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집돼지보다 멧돼지를 사냥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고, 사냥꾼 여럿이 달려들어야 겨우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으니 효율이 떨어졌습니다. 왕실에서는 제례상(祭禮床)에 돼지를 올리기 위해 직접 기르기도 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돼지는 체구가 작아 당나라에서 수입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제례상이란 조상에게 올리는 의식용 음식상을 뜻하며, 조선 왕실이 연간 소비한 돼지가 500마리를 넘었다고 하니 수입이 불가피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짚을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제육볶음의 붉은 매운맛을 결정짓는 고추장(苦椒醬)은 이 시기에는 아직 없었습니다. 고추장이란 고춧가루를 메줏가루, 찹쌀 등과 발효시켜 만든 한국 전통 장류로,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18세기 이후에야 조리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즉 조선 초중기 돼지고기 볶음 요리는 간장 베이스였고, 지금 우리가 아는 매콤하고 붉은 제육볶음과는 맛의 결이 상당히 달랐을 것입니다.

남성의 소울푸드가 된 사회문화적 배경
제육볶음이 남성들, 특히 직장인과 택시기사들 사이에서 점심 메뉴 부동의 1순위로 꼽히는 건 제 주변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기사식당을 가보면 테이블 위 제육볶음 비율이 압도적이고, 남초 직장의 구내식당 메뉴판에도 제육볶음은 주 2~3회는 기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이 고기를 더 좋아하는 건 단순히 입맛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식품 소비와 성별 연구에서는 고기 섭취와 남성성 인식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들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이 강한 남성일수록 육류 소비가 많다는 경향이 보고된 바 있으며(출처: 한국학술지인용색인 KCI), 이는 1940년대 서구 광고에서 '고기는 노동하는 남성의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심어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상관관계(相關關係)를 인과관계(因果關係)로 확장하는 건 무리입니다. 상관관계란 두 변수가 함께 움직이는 경향을 말하고, 인과관계란 한 변수가 다른 변수를 직접 유발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남성이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남성성이 강해진다는 식의 해석은 과학적 검증이 더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제육볶음이 '스트레스 해소용 음식'으로 통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매운맛에 반응해 분비되는 엔도르핀(Endorphin)은 뇌에서 분비되는 천연 진통·쾌감 물질로, 짧은 점심시간에 빠르게 자극적인 만족감을 줘야 하는 직장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제육볶음의 강한 맛이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제가 기사식당에서 처음 먹었을 때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흔한 볶음 요리겠거니 했는데, 즉석에서 냄비에 볶아주는 방식이 고기는 싱싱하고 채소는 아삭하게 살아 있어서 일반 식당에서 미리 볶아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대중화의 시점과 지역별 레시피 차이
돼지 사육이 본격화된 건 사실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입니다. 돼지는 소처럼 밭을 갈거나 운반에 쓸 수 없어 '먹는 것 외엔 쓸모없다'는 인식 탓에 사육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뀌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이고, 축산업(畜産業)이란 가축을 계획적으로 번식·사육하여 생산물을 공급하는 산업을 뜻하는데, 한국의 본격적인 돼지 축산업은 1960~7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궤도에 올랐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돼지 사육 두수는 약 1,100만 두를 넘습니다(출처: 농림축산식품부).
제육볶음이 식당 메뉴로 자리 잡은 건 1980년대 중반으로, 서울 중구 일대 식당들이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지역별로 맛의 결이 다르다는 점도 재밌습니다. 제가 경험한 범위에서 정리하면 대략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 전라도식: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함께 써서 색이 짙고 매운맛이 강한 편. 단맛도 함께 올라와 중독성이 있습니다.
- 경상도식: 간장 베이스 양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색이 상대적으로 연하고 짭조름한 감칠맛이 두드러집니다.
- 서울·수도권식: 고추장과 간장을 혼합해 매운맛과 짠맛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 주류. 마늘을 많이 넣는 게 특징입니다.
- 기사식당식: 즉석 냄비 조리 방식이 많아 고기 육즙(肉汁)이 살아 있습니다. 육즙이란 고기 조직 안에 함유된 수분과 지방이 열에 의해 배어나오는 액체를 말하며, 이게 살아있을 때 맛이 확실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경험으로 비교해 보면, 저는 서울 기사식당 스타일이 가장 취향에 맞았습니다. 고기가 질겨질 틈 없이 바로 볶아서 내오고, 양파와 대파가 완전히 숨죽지 않아 식감이 살아 있어서입니다.
오삼불고기·두루치기로 이어지는 응용의 계보
제육볶음이 한국인의 창의성과 만나면서 파생된 요리들이 꽤 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직접 자주 해먹는 게 오삼불고기입니다. 돼지고기와 오징어를 같은 양념에 볶는 조합인데, 처음엔 어울릴까 싶었지만 먹어보면 해산물의 감칠맛이 돼지고기의 기름기를 잡아주면서 의외로 궁합이 좋습니다. 쭈꾸미를 넣으면 쭈삼불고기가 되는데, 이 역시 제가 자주 해먹는 메뉴입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집에 돼지고기가 남으면 냉동 쭈꾸미를 꺼내서 같이 볶아버리는 게 거의 공식이 됐습니다.
두루치기(豚肉炒)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두루치기란 돼지고기를 채소와 함께 볶되 국물이 자작하게 남도록 조리하는 방식으로, 제육볶음보다 국물이 많고 야채 비중이 높습니다. 이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맛이 별미인데, 일반적으로 두루치기와 제육볶음을 같은 음식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제 경험상 이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두루치기는 찌개와 볶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음식으로, 밥 한 공기 비벼먹기엔 두루치기가 훨씬 낫습니다.
음식 연구자들은 이런 파생 조합을 퓨전 한식(Fusion 韓食)이라는 범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퓨전 한식이란 전통 조리법의 기반 위에 새로운 식재료나 조리 방식을 접목한 현대적 한식을 뜻합니다. 오삼불고기와 쭈삼불고기가 여기에 해당하고, 이 둘은 이제 분식집 메뉴판에도 기본으로 올라오는 대중 메뉴가 됐습니다. 한국인이 기존 레시피를 응용하는 속도가 꽤 빠르다는 걸, 이 계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