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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과 토란국 (역사와 유래, 토란의 독성, 다른 나라의 토란)

움치둠치 2026. 9. 1. 22:19

목차


    토란은 어릴 적에 절대 먹지 않은 음식중 하나였습니다. 일단 미끈미끈한 식감이 싫었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이 '이걸 왜 먹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한두 숟가락 먹고는 다시는 손을 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년 중에서 토란국을 끓이는 기간이 아주 적어서 식탁에 많이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입맛이 달라졌는지 몰라도 가을이 다가오면 그렇게 싫어했던 토란국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토란은 미끈거리지만 씹으면 포근포근한 것이 감자같기도 하고 국물도 뽀얀 것이 깊은 맛이 나서 영양보충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흙 속의 알, 토란이 추석 절식이 된 역사적 배경

     

    토란(土卵)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흙 속의 알'이라는 뜻입니다. 땅속에서 알줄기, 즉 괴경(塊莖)의 형태로 자라는데, 괴경이란 땅속줄기가 양분을 저장하며 덩어리처럼 부풀어 오른 부위를 말합니다. 감자도 같은 방식으로 자라지만, 토란은 감자보다 훨씬 먼저 우리 식탁에 올랐습니다.

     

    토란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건 고려 고종 때인 13세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로 꼽히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토란이 약재이자 식재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약구급방이란 고려 시대에 편찬된 의학서로, 당시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응급 처치법을 정리한 책입니다. 이 기록은 토란이 고려 이전부터 이미 한반도에 뿌리내린 작물이었다는 근거로 봐도 무방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같은 농서와 조리서에 토란 재배법과 조리법이 상세하게 실렸고,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뱃속의 뭉친 것을 해소하고 군살을 없앤다"고 효능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지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추석 절식(節食)으로 토란국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식이란 명절이나 절기에 맞춰 차려 먹는 제철 음식을 뜻합니다.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기록으로 증명된 전통입니다.

     

    추석에 토란국을 끓이는 이유는 단순히 계절 음식이어서만은 아닙니다. 토란은 어미 토란인 모구(母球) 주변으로 자구(子球), 손구(孫球)가 줄줄이 달려 자랍니다. 흙을 파내면 크고 작은 알들이 뭉쳐 있는 형태인데, 선조들은 이 모습을 자손이 번창하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한가위에 온 가족이 모여 이 토란을 나눠 먹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원이었던 겁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토란의 영양, 구황작물 그 이상

     

    토란은 오랫동안 구황작물(救荒作物)로 쓰였습니다. 구황작물이란 흉년이나 식량 부족 시기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작물을 말합니다. 쌀이 귀했던 시절, 토란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동시에 공급하는 귀한 식재료였습니다. 실제로 감자와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까지 토란은 녹말의 주요 공급원 역할을 했습니다.

     

    영양 면에서 토란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무신(Mucin)이라는 성분입니다. 무신이란 토란 특유의 미끈거리는 점액 성분으로, 위장과 장의 점막을 감싸 보호하고 소화기관을 강화하는 작용을 합니다. 어릴 때 그렇게 싫었던 그 미끈함이 사실은 위를 지켜주는 성분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좀 민망합니다.

     

    칼륨 함량도 높아서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돕고 고혈압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식이섬유도 풍부해 장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변비와 대장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추석에 갈비찜, 전, 잡채처럼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을 잔뜩 먹은 뒤 토란국으로 마무리하는 게 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는지, 영양학적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토란 줄기 부분인 토란대도 버릴 게 없습니다. 칼슘, 철분, 비타민 등이 풍부한 섬유질 식품으로, 말려두면 일 년 내내 육개장이나 나물 무침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싫어한 건 토란국이었는데, 사실 토란대 나물은 또 잘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같은 재료에서 나온다는 걸 알고나니 아이러니한 느낌입이었습니다.

     

    아린 맛 제거, 토란 손질의 핵심 과학

     

    토란은 독성이 있어서 그냥 먹을 수 없기도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만해도 아려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돕는답시고 맨손으로 껍질을 벗겼다가 쓰라려서 30분 내내 손을 비볐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바로 옥살산칼슘(Calcium Oxalate) 때문입니다. 옥살산칼슘이란 토란의 세포 안에 있는 결정 구조의 성분으로, 피부나 점막에 닿으면 물리적 자극을 일으켜 가려움증을 유발합니다. 생으로 먹으면 입안이 아리고 심하면 독성 반응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토란 손질 시에는 반드시 장갑을 착용해야 합니다. 손에 소금이나 베이킹소다를 묻히면 어느 정도 완화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장갑입니다. 껍질을 벗긴 뒤에는 소금물이나 쌀뜨물에 5~10분 정도 초벌로 삶아내는 것이 기본입니다. 쌀뜨물의 전분 성분이 아린 맛을 흡착해 주는 원리인데, 이건 선조들이 수백 년에 걸쳐 경험으로 쌓아온 지혜입니다.

     

    한 가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토란국을 끓일 때 다시마를 함께 넣는 것입니다. 다시마에 들어있는 알긴산(Alginic Acid)이 토란의 유해 성분과 결합해 아린 맛을 중화시킵니다. 알긴산이란 다시마, 미역 같은 갈조류에서 추출되는 천연 다당류로, 중금속 흡착 기능도 알려져 있습니다. 국물 맛의 감칠맛도 높여주니 넣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토란을 고를 때는 아래 사항을 확인하면 실패가 없습니다.

     

    1. 표면에 흙이 적당히 묻어 있고, 껍질에 촉촉한 수분기가 느껴지는 것을 고른다.
    2. 모양이 원형에 가깝고, 머리 부분에 푸른색이 없는 것을 선택한다.
    3. 껍질이 갈라져 있거나 지나치게 길고 가느다란 것은 피한다.
    4. 잘랐을 때 속이 흰색이고 끈기가 강하면서 윤기가 도는 것이 좋다.
    5. 보관 시에는 냉장 금지. 흙이 묻은 채로 신문지에 싸서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둔다.

    냉장 보관하면 쉽게 상하는 이유는 토란이 추위와 건조함에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저도 처음에 냉장고에 넣었다가 금방 물러진 경험이 있어서 확실히 기억합니다.

     

    세계 속의 토란, 사모아에서 필리핀까지

     

    토란이 한국만의 식재료가 아니라는 건 직접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영어권에서는 타로(Taro)라고 부르는데, 원산지가 인도 동북부와 동남아시아 열대 지역으로 추정되는 만큼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주식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사모아에서 본 타로는 한국 토란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컸습니다. 건장한 성인 남성 주먹 두세 개를 합친 크기 정도였습니다. 껍질을 벗기면 연한 보라색을 띄는데, 주로 삶은 뒤 코코넛 크림에 넣고 약간 졸여서 먹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조합이라 반신반의했는데, 먹어보면 고소하고 담백해서 나름 중독성이 있었습니다. 사모아 사람들의 덩치가 유난히 큰 이유가 타로를 많이 먹어서 그런 거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던 기억도 납니다.

     

    필리핀에서 만난 타로 요리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필리핀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타로 케잌과 타로가 들어간 빵, 타로 버블티는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매년 생일마다 타로 케잌을 따로 주문할 정도가 됐습니다. 자색 토란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 색소가 천연 보라색을 내는데, 안토시아닌이란 식물의 색소 성분으로 항산화 작용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색이 음식에 들어가면 보기에도 예쁘고 자연스러운 단맛도 더해집니다. 한국 토란이 흰색 계열인 것과는 품종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타로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는 걸 알고 나니, 우리 토란국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키워온 식재료를 우리는 추석 아침 국으로 끓여 조상께 올렸다는 게 왠지 모르게 자부심이 생기고 조상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