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명란젓은 밥도둑이 아니라 밥강도입니다. 입맛이 뚝 떨어진 날 밥을 물에 말아 명란젓 하나 올려 먹으면 어느새 그릇이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먹어왔는데, 알고 보니 젓갈이 발효 과정에서 혈압에 도움을 주는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짜서 건강에 안 좋다고만 생각했던 음식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수천 년 밥상 위에 자리한 발효식품
젓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까지 닿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신문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폐백 음식 목록에 젓갈을 뜻하는 '해(醢)'가 포함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실 혼례 상에 오를 만큼 귀한 식재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그 전성기가 열려 당시 요리 문헌에 기록된 젓갈 종류만 150가지가 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오징어젓, 새우젓 같은 해산물 젓갈뿐만 아니라 토끼, 사슴, 꿩 고기로 만든 육젓까지 있었다니 조상들의 발효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실감이 됩니다.
젓갈은 기본적으로 염장 발효식품입니다. 생선이나 패류의 살, 알,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자가 효소와 미생물이 단백질을 분해하며 독특한 감칠맛을 만들어냅니다. 상온에서 2~3개월 숙성하면 원형이 살아 있는 젓갈이 되고, 6~12개월 이상 두면 형태가 완전히 분해된 젓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걸러내면 멸치액젓, 까나리액젓이 됩니다. 저한테는 명란젓과 창란젓이 대표 선수인데, 창란젓은 어릴 적엔 입에도 안 댔다가 어른이 된 후 처음 먹어보고 그 깊은 맛에 반해 버렸습니다. 김치 담글 때 젓갈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의 차이는 단순히 짠맛의 차이가 아닙니다. 발효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감칠맛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제 경험상 젓갈 없는 김치는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짠 음식인데 혈압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젓갈은 나트륨 덩어리 아닌가 싶었는데,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펩타이드(Peptide)가 혈압을 낮추는 데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펩타이드란 아미노산 두 개 이상이 결합한 분자 구조로, 발효 과정에서 어육 단백질이 효소에 의해 잘게 쪼개지며 생성됩니다. 이 물질이 혈관을 수축시키는 효소인 안지오텐신 전환효소(ACE)의 활동을 억제해 혈중 지질 농도와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혈압 위험군을 대상으로 저염식과 젓갈 10g을 함께 섭취하게 했더니 일주일 후 혈압이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싶은 건, 이 결과를 "젓갈이 고혈압을 치료한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실험 조건이 저염식과 병행한 경우였고, 단독으로 젓갈을 많이 먹으면 오히려 나트륨 과다 섭취로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혈압약으로도 조절이 안 되는 고혈압 환자나 신장 질환이 있는 분은 젓갈 섭취 자체를 피하는 게 맞습니다.
젓갈의 건강 효과를 더 잘 활용하려면 먹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 고추와 마늘을 곁들이면 항산화 성분이 혈압 완화에 추가적인 도움을 줍니다.
- 배를 함께 먹으면 배의 칼륨이 젓갈의 나트륨 배출을 돕습니다.
- 들기름을 뿌려 먹으면 펩타이드 흡수율이 높아집니다.
- 하루 섭취량은 건강한 성인 기준 30g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권고됩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고향이 북한인 할머니께서 명태식해를 가져다 주셨는데, 한 입 먹고 그 황홀한 맛에 한동안 멍했습니다. 명태식해는 엄밀히 젓갈과는 조금 다르지만, 발효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감칠맛의 본질은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발효식품이 서로 통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젓갈 속 미생물이 열어가는 가능성
한국식품연구원은 전통 젓갈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연구 자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멸치젓갈에서 발견된 사이크로박터(Psychrobacter)라는 미생물은 비타민 B12 생성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여기서 비타민 B12란 신경 기능 유지와 적혈구 생성에 필수적인 영양소로, 채식 위주 식단에서는 섭취하기 어렵습니다. 화학 합성 방식이 아닌 전통 발효 유래 미생물을 통해 이 영양소를 생산할 수 있는 경로가 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 미생물은 환경 오염 물질을 분해하는 유전자도 가진 것으로 분석돼, 친환경 정화 기술 분야 응용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새우젓에서 발견된 페니바실러스(Paenibacillus)는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미생물은 키틴(Chitin) 분해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키틴이란 새우, 게 등 갑각류 껍질의 주요 성분으로, 연간 발생하는 수산 부산물이 약 80만 톤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처리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출처: 한국식품연구원). 이 미생물을 활용하면 버려지는 갑각류 껍질을 화장품 원료인 키토산으로 전환하는 업사이클링(Upcycling) 기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업사이클링이란 폐기물을 단순 재활용하는 것을 넘어 더 높은 가치의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개념입니다.
이와 별개로 한국식품연구원은 K-푸드 열풍을 타고 늘어나는 해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전통 젓갈 생산 표준 가이드라인도 수립 중입니다. 제조 공정의 안전성과 품질을 검증해 산업체에 전달하고, 발효 과정에서 젓갈 특유의 향미를 더 살릴 수 있는 향미 증진 공정 연구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식품 안전 기준 및 발효식품 연구 관련 정보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수천 년을 이어온 음식이 지금 이 시점에 미생물 연구, 환경 정화, 영양소 개발이라는 새로운 맥락과 연결되는 게 꽤 흥미롭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명란젓과 창란젓을 밥상에 올릴 텐데, 이제는 단순한 밥도둑이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한 이야기를 품은 음식으로 느껴집니다. 젓갈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너무 짜지 않은 양념 오징어젓이나 명란젓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단, 하루 30g 이내라는 기준은 기억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 상태에 따른 식이 관리는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