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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어릴 때 절구가 뭔지 몰랐습니다. 그냥 마당 한켠에 놓인 무거운 돌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무거운 돌 안에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절구와 공이는 단순한 조리도구가 아니라 수천 년 식문화를 이어온 생활 유산입니다.
마당 한켠의 돌덩어리, 그게 절구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머니 댁 마당에는 절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는 그냥 커다란 돌이었고, 오히려 장난감에 더 가까웠습니다. 오재미나 공을 멀리서 던져 절구 안에 넣는 게임을 혼자 하기도 했고, 작은 보물창고처럼 안에 뭔가를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수천 년 역사를 가진 도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절구의 역사를 따라가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도 절구와 비슷한 형태의 석기가 발굴된 바 있습니다. 농경문화(農耕文化)란 인류가 곡식을 직접 재배하고 가공해 먹기 시작한 생활 방식을 뜻하는데, 이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곡식의 껍질을 벗기고 빻는 절구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가정은 물론 궁중에서도 절구를 사용했고, 한약재를 다루는 약방에서도 필수 도구였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절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딱 정해져 있었습니다. 명절이나 김장철, 그리고 메주를 만들 때였습니다. 평소에는 부엌 구석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던 공이가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왔고, 절구와 만나 비로소 제 역할을 했습니다.

콩을 찧던 날, 할머니 손이 걱정됐습니다
메주를 만드는 날이 되면 할머니께서는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저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공이를 번쩍 들어 콩을 내리치면,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할머니께서는 절구 안의 콩을 손으로 뒤섞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공이를 내리치고, 또 할머니가 손을 넣어 섞고. 그 반복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때 저는 매번 조마조마했습니다. 공이를 잘못 내리쳤다가 할머니 손을 찧을까봐 심장이 쫄깃했는데, 정작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유롭게 콩을 뒤섞으셨습니다. 수십 년은 해온 손놀림이니 당연히 익숙하셨겠지만, 어린 저한테는 그게 꽤 스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처럼 절구로 콩을 찧는 방식은 대두(大豆)의 세포벽을 눌러 으깨는 방식입니다. 대두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주콩, 즉 노란 콩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믹서기처럼 고속 회전하는 칼날 방식과 달리, 절구는 압착(壓搾)의 원리로 재료를 가공합니다. 압착이란 위에서 힘을 가해 재료를 짓눌러 으깨는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재료 고유의 향 성분이 비교적 잘 보존됩니다. 믹서기를 쓰면 칼날 마찰로 열이 발생하는데, 이 열이 마늘이나 깨의 휘발성 향기 성분을 일부 날려버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차이가 느껴집니다.
다만 절구로 만든 양념이 항상 믹서기보다 맛이 뛰어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음식의 맛은 조리법, 재료의 신선도, 개인 취향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절구 양념이 더 맛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써보니 차이를 느끼려면 재료 자체의 품질이 먼저 받쳐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절구의 재질에 따른 특성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석절구(石臼): 화강암이나 현무암 등 단단한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게가 있어 마늘, 깨, 고추 같은 단단한 재료를 빻는 데 적합합니다. 할머니 댁에 있던 것도 이 석절구였습니다.
- 목절구(木臼): 나무로 만들어 비교적 가볍고 충격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찹쌀 등을 찧어 떡을 만드는 용도로 주로 쓰였습니다.
- 약절구(藥臼): 크기가 작고 정밀하게 만들어진 절구로, 한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약방의 상징적인 도구이기도 합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절구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식품 가공의 핵심 도구로 기능해왔으며, 지역과 재료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이 되고 나니, 어릴 때 그냥 돌덩어리로 봤던 제 시각이 좀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항이 된 절구, 그래도 괜찮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 그 절구가 어떻게 됐는지 제 기억에 없습니다. 어찌 됐든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집안에서 절구는 사라졌습니다. 아마 많은 가정이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 것입니다. 믹서기가 보급되면서 절구의 설 자리가 좁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전원주택 마당에서 돌절구를 어항처럼 활용하는 모습을 종종 봤습니다. 물을 채우고 물고기나 수련을 키우는 미니 연못으로 쓰는 것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좀 낯설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름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석절구는 워낙 육중해서 함부로 버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조리도구로 자주 쓰기도 번거로우니 인테리어 소품이나 생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것도 하나의 활용 방식이라고 봅니다.
전통 한식당이나 사찰음식, 궁중음식을 만드는 곳에서는 지금도 절구를 씁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에 따르면(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전통 발효식품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물리적 가공 방식이 최종 맛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들이 존재합니다. 발효식품(醱酵食品)이란 미생물의 작용으로 식재료가 변화하여 독특한 풍미와 영양을 갖게 된 음식을 말하는데, 메주나 된장, 간장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절구로 콩을 찧는 과정이 단순히 옛날 방식이 아니라 발효 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머니가 굳이 절구를 쓰셨던 이유가 조금은 더 납득이 갑니다.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절구를 다시 찾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 마늘을 찧고 깨를 빻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히 트렌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손으로 뭔가를 직접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절구와 공이를 볼 때마다 저는 그날 콩 찧던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조마조마하게 공이를 들어올리던 저와, 아무렇지도 않게 콩을 뒤섞던 할머니의 손. 그 기억이 절구라는 도구에 고스란히 얹혀 있습니다. 전통 조리도구에 관심이 생겼다면 직접 돌절구 하나를 구해서 마늘이나 깨를 찧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향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효율이 아닌 경험으로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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