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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잡채가 원래 면 요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중국집에서 당면 없이 야채와 고기만 나오는 잡채를 받아 들고 황당했던 그날, 오히려 제가 잡채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간장 베이스의 달콤짭짤한 맛과 탱글탱글한 당면 식감으로 맵찔이인 제게 최고의 음식이었던 잡채, 그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흥미롭습니다.
간신의 뇌물에서 시작된 잡채의 역사
잡채(雜菜)란 한자 그대로 풀면 '여러 채소를 섞은 요리'를 뜻합니다. 이름만 보면 소박한 채소 요리처럼 느껴지지만, 탄생 배경은 꽤 정치적입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시절, 호조판서를 지낸 이충이라는 인물이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집에서 만든 진귀한 음식을 궁궐로 보냈는데, 그중 왕의 입맛을 가장 사로잡은 것이 바로 잡채였습니다. 광해군이 이충의 음식이 오지 않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잡채 하나로 권력을 유지한 셈입니다.
당시의 잡채는 지금 우리가 아는 당면 요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이, 도라지, 표고버섯, 석이버섯, 송이버섯, 숙주나물 등 수십 가지 채소를 채 썰어 볶고, 전복이나 귀한 고기를 얹어 겨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는 최고급 샐러드에 가까운 요리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파인다이닝(fine dining), 즉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정성 가득한 코스 요리의 한 접시였던 셈입니다. 사람들이 이충을 두고 '잡채 상서'라고 비웃었던 것도, 그 요리가 왕의 환심을 사는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를 알고 나니 잡채를 단순히 '간신의 뇌물'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보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요리가 권력자의 식탁에 오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당시 식재료와 조리 기술의 집약을 의미합니다. 잡채는 탄생 순간부터 조선 최고 수준의 식문화를 담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훗날 서민의 잔칫상까지 내려오게 된 여정이 오히려 더 대단하다는 느낌입니다.

당면 도입, 100년의 짧은 역사가 바꾼 것들
일반적으로 잡채는 전통 한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경험상 그 핵심 재료인 당면의 역사는 고작 100년 남짓입니다. 1919년 황해도 사리원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당면 공장이 처음 세워지면서 한반도에 당면이 본격 보급되었습니다. 당면(唐麵)이란 녹두나 감자, 고구마 전분을 원료로 만든 투명한 국수로, 한국에서는 주로 고구마 전분을 사용합니다. 영어권에서는 글래스 누들(glass noodle), 즉 '유리 국수'라고 부릅니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당면 생산이 대량화되면서 잡채의 운명이 뒤바뀝니다. 수십 가지 채소와 귀한 버섯, 고기를 모두 준비하는 원래 방식은 재료비도 많이 들고 손도 엄청나게 갑니다. 반면 물에 불리면 양이 몇 배로 늘어나는 당면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측면에서 탁월했습니다. 서민들 입장에서 당면 한 줌이면 푸짐한 잔칫상 한 접시가 완성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채소 요리가 면 요리로 변신한 것입니다.
어떤 시각에서는 이 변화를 단순한 '비용 절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식문화의 대중화(popularization)란 원래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대중화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는 과정을 말하는데, 잡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면 하나가 들어오면서 왕실 음식이 서민 밥상 위에 오르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잡채를 기억하고 즐기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처음 중국집에서 당면 없는 잡채를 받았을 때의 당혹감처럼, 요즘에는 반대로 야채와 고기를 빼고 당면과 간장만으로 만드는 비빔당면이라는 새로운 음식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주재료와 부재료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잡채는 지금도 변하는 중입니다.

명절 잡채가 쉬는 이유, 그리고 제대로 만드는 법
명절 때마다 잡채를 한 솥 가득 해놓으면 반드시 겪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도 면이 퉁퉁 불고 맛이 변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고 나면 피할 수 있는 문제인데, 원인은 전분의 호화(gelatinization)와 노화(retrogradation) 현상에 있습니다.
호화란 전분이 열과 수분을 만나 팽창하고 부드러워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당면을 삶으면 쫄깃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면 노화란 한번 호화된 전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딱딱하게 굳는 현상입니다. 여기에 시금치나 양파 같은 채소에서 나온 수분이 섞이면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잡채가 빠르게 상하는 것입니다.
오래가는 잡채를 만들기 위한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채소는 각각 따로 볶아 수분을 충분히 날린 뒤 식혀서 버무린다. 한꺼번에 볶으면 수분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 삶은 당면은 물기를 완전히 뺀 뒤 간장, 설탕, 식용유를 넣고 프라이팬에서 한 번 더 볶아 표면을 기름으로 코팅해 준다. 이렇게 하면 당면이 서로 달라붙지 않고 간도 골고루 밴다.
- 완성된 잡채는 완전히 식힌 뒤 밀폐 용기에 보관한다. 따뜻한 상태로 보관하면 잔열로 전분 노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 남은 잡채를 다시 먹을 때는 전자레인지보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는 것이 훨씬 낫다. 굴소스 한 스푼을 추가하면 중국집 스타일로 변신한다.
이 방식은 궁중식 조리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재료를 따로 손질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만큼 결과가 다릅니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서도 전통 궁중음식의 조리 방식을 기록하고 있는데, 재료를 각각 손질해 따로 조리한 뒤 합치는 방식이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리는 기본 원칙으로 꼽힙니다.
세계인의 식탁에 오른 잡채, 그 아이러니
요즘 해외에서 잡채가 심상치 않습니다. 불고기, 비빔밥 다음으로 외국인들이 열광하는 한식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 이유가 우리 예상과는 좀 다릅니다. 외국인들이 잡채에 끌리는 것은 맛보다 식감(texture) 때문입니다. 식감이란 음식을 씹을 때 느껴지는 물리적 감각을 말하는데, 고구마 전분 특유의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감촉이 파스타나 라면에 익숙한 외국인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인 것입니다.
게다가 건강식이라는 인식도 단단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글루텐 프리(gluten-free)란 밀가루에 들어 있는 단백질인 글루텐을 포함하지 않는 식품을 뜻하는데, 고구마 전분으로 만드는 당면은 글루텐이 없어 소화가 잘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고기를 빼면 완벽한 비건(vegan) 요리가 되기도 하고, 각종 채소가 듬뿍 들어가니 샐러드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한국식품연구원에 따르면 한식의 해외 인지도 상승과 함께 당면 기반 한식 제품의 수출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우리에게 잡채는 기름지고 손 많이 가는 명절 음식인데, 외국인들 눈에는 웰빙 푸드로 통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맵찔이인 제 입장에서는 맵지 않고 달달짭짤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잡채가 충분히 최고였는데, 거기에 건강식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어버렸으니 어딘가 과분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한 가지 더, 한국식 중화요리로 발전한 잡채밥도 빼놓기 아깝습니다. 중국 본토에는 없는, 완전히 한국에서 창조된 요리인데 당면 볶음에 짜장 소스, 밥을 함께 먹는 조합은 탄수화물 위에 탄수화물을 올린 죄책감 충만한 조합이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맛입니다. 제가 직접 먹어봤는데 이건 예상 밖으로 중독성이 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