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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국의 역사, 신석기부터 현대까지

움치둠치 2026. 9. 9. 15:59

목차


    복국이 해장 음식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는 성인이 될 때까지는 먹어보지 못했고 어른이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접해봤습니다. 뜨거운 국물이 시원하다고 처음 생각하게 된 국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복어의 살점이 고급스러우면서도 고기와 비슷한 식감도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맛이었습니다.

     

    이러한 복국이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우리 밥상에 올랐는지 제대로 아는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이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뒤에는 선사시대 패총부터 조선 문인들의 논쟁, 그리고 항구 도시의 삶까지 꽤 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신석기 조개더미에서 시작된 복어 식용의 역사

     

    복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생각보다 훨씬 먼 시대에 닿습니다. 부산 동삼동과 김해 수가리의 패총(貝塚), 즉 신석기·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조개더미 유적에서 복어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패총이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와 음식 쓰레기가 층층이 쌓인 유적으로, 당시 식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타임캡슐입니다. 복어 뼈가 거기서 나왔다는 건, 우리 조상들이 적어도 수천 년 전부터 복어를 잡아 먹었다는 명확한 물증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놀랐던 건 따로 있습니다. 신라 왕족의 무덤인 서봉총 재발굴 과정에서도 복어 뼈가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이 뼈는, 복어가 제사 음식으로 쓰일 만큼 귀하게 여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지금 우리가 부산 골목 식당에서 부담 없이 먹는 복국이, 한때는 왕족의 제상에 오르던 음식이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어를 많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건 고려시대부터로 봅니다. 당시 문인과 관료들이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글을 즐겨 읽었고, 그의 시에 복어 예찬이 담겨 있었습니다. 소동파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황복(黃鰒), 즉 산란기에 민물로 올라오는 복어를 먹고 "목숨을 걸고 먹을 만한 맛"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것이 복어 요리 자체가 그만큼 맛있다는 건지, 아니면 그 집안의 솜씨를 칭찬한 건지는 지금도 해석이 엇갈립니다. 저는 그 모호함 자체가 오히려 이 음식의 매력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돈(河豚)이라는 표현도 이 시기에 정착했습니다. 하돈이란 글자 그대로 '강에 사는 돼지'라는 뜻입니다. 화가 나면 몸을 부풀리는 모습이 돼지와 닮았다거나, 복어가 내는 소리가 돼지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거론됩니다. '해돈(海豚)'이 아니라 '하(河)', 즉 강을 쓴 이유는 소동파처럼 당시 사람들이 바다 복어보다 강을 거슬러 올라온 황복을 주로 먹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문인들이 벌인 복어 식용 찬반 논쟁

     

    조선시대에 이르면 복어는 문헌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록의 특징은 단순한 요리 정보가 아니라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진지하게 다투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복어에 대해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독이 있다"고 적으면서도 피로 해소와 약재로서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동의보감이란 1613년에 완성된 조선 최고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당시 의학 지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는 복어를 상세히 분류하면서 내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핏물을 충분히 우려내는 민간 조리법을 기록했습니다. 자산어보란 1814년경 완성된 어류 도감 성격의 책으로, 흑산도 유배 중 직접 관찰하고 정리한 현장 기록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집안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덕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둘 다 복어를 절대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이덕무는 그 당부를 평생 지켰다고 전해집니다. 한편으로는 그 집안이 너무 엄격했던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당시 복어 독성 정보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실제로 성종 24년인 1493년에는 경상도 진해 주민 24명이 해산물을 먹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왕과 신하들 사이에 해산물 채취 금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복어의 독성분인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으니, 찬반이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테트로도톡신이란 복어의 간, 난소 등에 집중된 맹독성 신경독으로, 현재까지도 해독제가 없는 독소입니다.

     

    조선시대 복어 식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동의보감(1613): 복어의 약재 가치와 독성을 동시에 기록. 내장 제거의 중요성 언급
    2. 자산어보(1814년경): 복어 분류 및 조리 시 주의사항 수록. 현장 관찰 기반의 실용 정보 포함
    3. 오주연문장전산고(조선 후기): 이규경이 하돈이라는 표현의 유래와 복어 독성에 대해 상세히 분석.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복어'라는 명칭이 이 책에서 정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봅니다
    4. 증보산림경제(영조 연간): 복어를 탐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경계하는 내용 수록

     

    겸재 정선의 그림 「행호관어(杏湖觀漁)」에도 복어가 등장합니다. 행주대교 인근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은, 조선시대 한강에 황복이 거슬러 올라왔다는 사실을 회화로 증언합니다. 지금 황복은 임진강에서 간혹 잡히는 정도지만, 당시에는 한강 중류까지 올라왔다니 그게 더 놀랍습니다. 제 경험상 음식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이렇게 그림이나 시에서 뜻밖의 단서를 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의 쾌감이 꽤 묘합니다.

     

    부산 항구가 완성한 복국 한 그릇

     

    오늘날 우리가 식당에서 마주하는 복국, 그러니까 뚝배기에 콩나물과 미나리를 넣고 맑게 끓인 그 형태는 사실 근현대 부산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부산은 수산물 유통의 거점 도시가 되었고, 항구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저렴하고 따뜻한 국물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복어는 그 수요에 딱 맞는 재료였습니다.

     

    복국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나는 복지리(복어 맑은탕)로, 식초를 한두 방울 떨어뜨려 복어 특유의 담백한 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복지리란 '지리'가 맑은 국물을 뜻하는 조리 방식의 명칭으로, 복어 본연의 단맛과 감칠맛을 느낄 수 있는 조리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복매운탕으로, 고춧가루와 마늘을 더해 얼큰하게 끓여내는 방식입니다. 같은 복어를 쓰더라도 이렇게 다른 맛이 나온다는 것이 상당히 신기했습니다.

     

    복국에 미나리와 식초를 넣는 이유는 선조들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미나리는 복어의 잔여 독성을 중화하고 체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삭한 식감이 국물 맛을 한층 살려줍니다. 식초는 복어 살의 단백질을 살짝 응고시켜 탱글한 식감을 유지시키고, 산성 성분이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민간 관습이 아니라 나름의 원리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복국을 먹을 때 미나리를 더 꼼꼼히 챙기게 됐습니다.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복국은 전국적인 해장 음식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맑고 담백한 국물이 속을 달래준다는 소문이 애주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고, 부산에서 시작된 문화가 전국 식당가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복국이 숙취를 과학적으로 치료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자극이 적고 따뜻한 국물 음식이라는 점 자체가 속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