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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빨간 배추김치보다 하얀 백김치를 훨씬 좋아합니다. 배추의 아삭한 식감과 고유의 맛을 좀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우리집 김치는 매운 고추를 써서 어린 나는 거의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백김치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있습니다. 게다가 백김치는 국물이 있어서 시원한 국물까지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백김치는 고춧가루 없이도 수천 년을 버텨온, 어쩌면 김치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음식이었습니다.

사실 고추 이전의 김치가 바로 백김치였습니다
김치 하면 빨간 양념이 먼저 떠오르지만,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건 임진왜란(1592년) 이후입니다. 그것도 김치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8세기가 넘어서였습니다. 그 전까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김치는 전부 하얗거나 맑은 빛이었습니다. 지금의 백김치나 동치미가 그 모습에 가장 가깝습니다.
고려 시대 문헌인 《동국이상국집》이나 《향약구급방》에도 채소를 소금이나 장에 절여 저장하는 '지(漬)' 문화가 등장합니다. 지(漬)란 채소를 염장하거나 액체에 담가 보존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염장 발효식품인 셈입니다. 삼국사기에도 이와 유사한 절임 채소 기록이 있으니, 한반도의 채소 발효 전통은 적어도 1,000년을 훌쩍 넘습니다.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꽤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빨간 김치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꽤 늦게 등장한 편이라는 거니까요. 백김치가 오히려 더 오래된 원형인데, 어쩐지 요즘은 조연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추가 없던 시절엔 무엇으로 맛을 냈을까요? 마늘, 생강, 그리고 소금이 전부였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발효가 이 셋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소금이 채소의 수분을 끌어내고, 유산균(乳酸菌)이 천천히 증식하면서 특유의 청량한 신맛과 감칠맛이 생겨납니다. 유산균이란 당을 분해해 젖산(lactic acid)을 만드는 균으로, 쉽게 말해 김치를 시큼하고 깊게 익히는 핵심 주인공입니다.
궁중 잔칫상에 오르던 이유, 발효원리에 있습니다
고추가 전국적으로 퍼진 조선 후기에도 백김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격식 있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임금의 수라상과 궁중 연회, 잔칫상에는 빠짐없이 백김치가 등장했고, 잣·밤·배·석이버섯 같은 귀한 고명을 속에 채워 담갔습니다. 조선 후기 조리서인 《규합총서》와 《시의전서》에도 백김치 담그는 법이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백김치가 이렇게 대접받은 이유 중 하나는 발효원리(醱酵原理) 덕분입니다. 발효원리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새로운 맛과 영양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고춧가루 없이도 배나 무에서 나오는 천연 당분이 발효되면서 청량감 있는 탄산감과 은은한 단맛이 생겨납니다. 자극이 없으면서도 깊은 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라는 말을 요즘 건강 식품 광고에서 자주 보셨을 겁니다. 프로바이오틱스란 장 건강에 유익한 살아 있는 미생물을 뜻합니다. 백김치도 붉은 김치와 똑같이 유산균이 풍부한 프로바이오틱스 식품입니다. 고춧가루가 없어서 위장 점막을 자극하지 않으니 소화기가 약한 분이나 어린아이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제가 백김치를 담그고 나서 애들 반찬으로 먼저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잘 먹더라고요.
2013년에는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특정 공동체의 생활 방식, 의례, 지식 등을 국제적으로 보호·인정하는 제도입니다. 김치를 담그는 행위 자체가 단순한 식품 생산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잇는 문화로 세계가 인정한 셈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유네스코 공식 등재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담가보니 이 순서가 핵심이었습니다
레시피는 여러 군데서 봤는데, 막상 해보면 순서 하나가 맛을 크게 바꿉니다.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핵심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절임배추(또는 직접 절인 배추) 2포기를 준비하고, 무 1개를 두껍게 썰어 굵은소금 1.5스푼으로 1시간 절입니다. 무 절인 국물은 버리지 말고 그대로 씁니다. 이 국물에 무의 단맛과 미네랄이 녹아 있어 국물 맛이 달라집니다.
- 찹쌀 1/4컵에 물 400ml를 붓고 약불에서 찹쌀죽을 쑵니다. 여기에 배 반 개, 양파 반 개, 마늘 16개, 생강 2쪽을 넣고 믹서기에 갈아줍니다. 갈아낸 것을 면보에 넣고 물 300ml를 부어 꼭 짜줍니다. 충분히 우려내야 국물이 탁해지지 않으면서도 달큰한 맛이 납니다.
- 물 1.5리터에 매실액 7스푼, 굵은소금 2.5스푼을 넣어 김치 국물을 만듭니다. 이 단계에서 간이 약간 싱겁게 느껴져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발효되면서 짠맛이 올라옵니다.
- 김치통에 배추, 쪽파, 무를 켜켜이 담고, 준비한 국물과 무 절인 국물을 모두 붓습니다. 실온에서 2일 숙성 후 냉장 보관합니다. 3일 차부터 본격적으로 맛이 들기 시작합니다.
제가 처음 담글 때 실수한 부분이 찹쌀풀을 너무 대충 걸렀던 겁니다. 면보로 충분히 우려내지 않으면 국물이 뿌옇고 텁텁해집니다. 두 번째에는 꼼꼼히 걸렀더니 국물이 맑아지고 맛도 훨씬 깔끔해졌습니다. 찹쌀풀을 쓰는 이유는 발효가 진행될 때 균이 먹을 당분을 공급해주는 역할 때문입니다. 밀가루풀로 대체해도 되지만 찹쌀 특유의 점성이 국물에 살짝 깊이를 더해줍니다.
항아리 대신 밀폐 김치통을 쓰는 경우 온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실온이 너무 높으면 이틀 만에 과하게 익어버립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하루 만에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농촌진흥청 자료에 따르면 김치 발효의 최적 온도는 0~10℃ 사이로, 천천히 낮은 온도에서 숙성할수록 유산균이 더 다양하게 번식한다고 합니다.(출처: 농촌진흥청)
백김치는 담그는 데 손이 많이 가는 편이지만, 한 번 제대로 해두면 식탁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갈비찜이나 잔치국수 옆에 하얀 국물 자작한 백김치 한 접시가 있으면 그게 묘하게 전체 상차림을 정갈하게 만들어줍니다. 고춧가루 없이도 수천 년을 이어온 음식인 만큼, 한 번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직접 담가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처음엔 간 맞추기가 어색할 수 있으니, 국물을 조금 덜어서 맛 보면서 소금을 조절하는 것이 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