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1년에 평균 2~3kg의 된장을 소비합니다. 된장찌개만 그런 게 아니라 나물 무침, 쌈장, 국물 요리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한식에 직간접으로 된장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처마 밑에 매달린 메주를 보면서 저게 대체 뭔지 한참을 궁금해했는데, 그 메주 덩어리 하나가 천년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천년 발효 — 된장은 어떻게 한식의 뿌리가 되었나
된장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 신문왕 3년, 즉 683년 기록에 따르면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납채 품목에 쌀, 꿀, 기름과 함께 간장과 된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왕실 혼례 예물로 쓰일 만큼 된장의 위상이 높았다는 뜻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계층의 벽을 넘어 백성에게까지 퍼졌습니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1049년 개성에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품으로 된장을 배급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미 그때 된장이 백성의 일상 식품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기부터 각 가정마다 직접 장을 담그는 문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이 바로 발효(醱酵)입니다. 발효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새로운 성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콩을 그냥 먹으면 소화 흡수율이 낮지만, 발효 과정에서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면서 소화는 쉬워지고 맛은 깊어집니다.
그 맛의 핵심 성분이 글루탐산(Glutamic acid)입니다. 글루탐산이란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혀에서 감칠맛으로 인식되는 물질입니다. 고기가 귀했던 시대에 된장은 육류 없이도 깊고 풍부한 맛을 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조선 시대가 되면 된장은 단순한 반찬을 넘어 본격적인 조미료로 진화합니다. 1715년 편찬된 산림경제에는 무려 45종에 달하는 장 담그는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장, 청태장, 집장처럼 지역마다, 집안마다 자기만의 레시피가 있었던 겁니다. 1700년대 음식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보면 나물을 무칠 때도, 생선을 조릴 때도, 고기를 양념할 때도 된장을 쓴 기록이 나옵니다. 된장이 만능 조미료로 쓰인 역사가 이미 수백 년은 된 셈입니다.
된장이 이렇게 빠르게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 기후가 겨울에 메주를 띄우고 봄에 장을 담그는 주기에 딱 맞았습니다.
- 서해안을 중심으로 소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장 담그기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쉬워졌습니다.
- 냉장 보관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상온에서 장기 저장이 가능한 된장은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삶은 콩을 절구에 넣고 커다란 절구공이로 내리찧는 걸 직접 해봤는데, 그 과정이 재미도 있고 뭔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메주를 빚은 이후 항아리에서 숙성되는 과정은 솔직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별로 볼 것도 없어 보였거든요. 그게 나중에 간장과 된장이 된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 단순한 과정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글루탐산과 전통 된장 — 현대 된장이 잃어버린 것

된장의 감칠맛 원리는 일본의 다시(だし) 육수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란 다시마의 글루탐산과 가다랑어포의 이노신산(Inosinic acid)을 조합해 만드는 일본식 국물 베이스입니다. 이노신산이란 핵산계 감칠맛 성분으로, 글루탐산과 함께 쓰이면 감칠맛이 수십 배 증폭되는 상승 효과를 냅니다. 일본이 이 두 가지를 따로 써서 조합한다면, 된장은 하나의 식품 안에 이 성분들을 동시에 농축시킨 셈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중에서 파는 된장이 예전 할머니 손맛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전통 방식의 된장은 메주를 만들고 항아리에서 숙성하는 데 최소 1년에서 길게는 3년 이상이 걸립니다. 이 긴 메주 숙성 기간 동안 바실루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를 비롯한 복합 미생물이 콩 단백질을 충분히 분해하면서 깊은 맛이 만들어집니다. 바실루스 서브틸리스란 메주에 자연적으로 번식하는 고초균(枯草菌)으로, 전통 된장의 특유의 향미와 맛을 만드는 핵심 미생물입니다.
반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현대 된장은 숙성 기간을 단축하고 균일한 맛을 내기 위해 통제된 발효 환경을 씁니다. 균일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전통 된장이 가진 복합적인 향미 층위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이 차이는 된장찌개보다 강된장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강된장이란 된장을 기름에 볶아 농도를 높인 요리로, 쌈밥이나 비빔밥에 얹어 먹으면 밥 한 그릇이 순식간에 비워집니다. 저는 어릴 때 강된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할머니가 직접 담근 된장으로 만든 강된장은 시판 된장으로는 흉내를 내기 어렵더군요. 볶는 방식이 같아도 출발점이 다르니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농촌진흥청 연구에 따르면 전통 발효 방식으로 숙성된 된장은 단기 숙성 된장보다 글루탐산 함량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농촌진흥청). 된장의 맛 차이는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발효 기간과 미생물 다양성의 차이에서 오는 과학적인 결과입니다.
김치가 K푸드의 대표 주자로 세계 무대에서 자리를 잡은 것에 비하면, 된장은 아직 그 위상에 걸맞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된장찌개나 강된장이 해외에서 덜 알려진 이유 중 하나는, 현대 된장이 전통 된장의 맛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역마다, 집안마다 달랐던 전통 된장의 다양성도 지금은 많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전통 발효 장류의 지역별 미생물 다양성과 기능성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전통 방식의 재현과 표준화에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식품연구원).
놀다가 넘어져서 다친 곳에 된장을 발라주시던 할머니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민간요법이라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된장이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항아리를 돌멩이로 건드렸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는데, 할머니가 왜 그렇게 항아리를 소중히 여기셨는지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제대로 된 전통 된장의 맛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다면, 된장도 김치 못지않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천년 이상 한국인의 식탁을 지켜온 맛이 그 정도 저력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된장을 직접 담그거나 소규모 전통 장류 생산자의 제품을 찾아보는 것도 그 맛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시판 된장 대신 한 번쯤 전통 방식으로 담근 된장을 구해서 강된장을 만들어 보시길 권합니다.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