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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의 역사 (전래 경로, 맵부심 유래, 캡사이신 효능)

by 움치둠치 2026. 6. 30.

저는 소위 말하는 맵찔이입니다. 어릴 적 김치가 너무 매워서 물에 씻어 먹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덜 매운 고추 품종이 퍼지면서 이제는 불닭볶음면도 겨우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즐겨 먹는 고추, 원래부터 우리 것이었을까요?

고추 전래 경로,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다

고추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입니다. 기원전 7000년경 중미와 남미에서 재배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 이걸 유럽에 처음 가져온 사람이 바로 콜럼버스입니다. 그는 1492년 항해에서 후추를 찾다가 대신 고추를 발견했고, 스페인으로 들여온 뒤 본격적인 재배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고추는 아프리카와 인도까지 전파됩니다. 여기서 스코빌 지수(SHU)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스코빌 지수란 고추의 매운 정도를 수치화한 단위로, 캡사이신 농도를 기준으로 측정합니다. 인도는 원래부터 강한 스코빌 지수를 가진 향신료를 즐기던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고추를 거부감 없이 빠르게 받아들였고, 현재도 전 세계 건고추 생산량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출처: 유엔식량농업기구(FAO)).

그럼 한국엔 누가 고추를 들여온 걸까요. 많은 분들이 중국을 떠올리시는데,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 경로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1542년 포르투갈 상인이 나가사키에 고추를 전파했고, 이후 예수회 신부들이 오이타 지역까지 퍼뜨렸습니다. 쓰시마섬까지 내려온 고추가 무역관을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경로입니다. 1613년 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남만초에는 독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만큼 당시 고추가 낯설고 자극적인 식재료였다는 방증입니다.

일본 기록에서는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고추를 가져왔다고 적혀 있고, 반대로 우리 기록에서는 외교자(일본에서 건너온 것)라는 표현을 씁니다. 서로 상대 나라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전래 경로를 종합하면 임진왜란 이전 이미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고추가 퍼져 있었고, 전쟁이 그 확산을 가속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맵부심 유래, 300년도 안 된 이야기

고추가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지금 같은 식문화가 만들어진 건 아닙니다. 17세기에 재배가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음식에 쓰이기 시작한 건 18세기에 들어서입니다. 이 시기에 기존에 쓰던 천초장, 즉 초피 열매로 만든 장이 고추장으로 대체됐고, 김치에도 고춧가루가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초피(천초)란 추어탕이나 마라탕에 들어가는 향신료로, 입이 얼얼해지는 화자호 특유의 마비감을 내는 식물입니다. 중국에서는 화자호라고 부르며 쓰촨 요리의 핵심 재료이기도 합니다. 초피는 채집에만 의존해야 해서 구하기 어려웠는데, 재배가 가능한 고추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아는 새빨간 배추김치가 등장한 것도 불과 300년이 채 안 됩니다. 17세기 조리서에는 고춧가루 없이 동치미 형태로 만든 김치가 주를 이루고, 18세기 조리서에 와서야 고춧가루를 넣은 김치가 등장합니다. 더 놀라운 건 지금 우리가 먹는 통배추 형태의 김치는 불과 100년 남짓한 역사라는 점입니다.

고추가 식탁을 완전히 장악한 건 20세기입니다. 1933년 동아일보에는 "가정의 반찬이 모두 고추로 양념되어 있고, 음식 본래의 맛이 고춧가루 맛으로 변했다"는 비판 기사가 실릴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 의학자들도 우려를 표했지만, 이미 흐름은 바꿀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국인의 맵부심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흐름이 조금 달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고추가 귀했던 초피 시대가 더 오래 이어졌다면, 어쩌면 저처럼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이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캡사이신 효능, 좋다고 무한정 먹으면 안 되는 이유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핵심 성분은 캡사이신(capsaicin)입니다. 캡사이신이란 고추에 함유된 알칼로이드 계열 화합물로, 혀와 피부의 통증 수용체인 TRPV1을 자극해 열감과 통증 반응을 유발합니다. 쉽게 말해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학창 시절에 직접 몸으로 배웠습니다. 김치를 담그다가 장갑도 끼지 않고 고춧가루 양념을 한참 버무린 뒤, 손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려서 한참을 고통받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매운 것을 손으로도 만지지 않게 됐습니다. 맛으로 느끼는 것과 피부로 느끼는 것이 같은 원리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캡사이신이 체내에서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신진대사 촉진: 체온을 높이고 에너지 소비를 늘려 체지방 분해에 도움을 줍니다.
  • 엔도르핀 분비 유도: 통증 반응에 맞서 뇌가 자연 진통 물질인 엔도르핀을 분비시킵니다.
  • 항산화 작용: 고추에 풍부한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C가 활성산소 제거에 기여합니다.
  • 항균 및 면역 강화: 캡사이신의 항균 특성이 초기 감기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다만 캡사이신 과잉 섭취는 위점막을 자극해 위염이나 위궤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1인당 건고추 소비량은 연간 약 4kg으로 세계 최고 수준인데, 이에 비례해 위장 질환 발생률도 높은 편입니다(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좋은 성분이 들어 있다고 무조건 많이 먹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추를 즐겨 먹는 분들이라면 먹는 양보다 먹는 방식을 먼저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저처럼 고추장을 밥에 조금씩 비벼 먹는 방식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과하지 않게, 그리고 위에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게 결국 오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원전 7000년 전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고추가 콜럼버스, 포르투갈 상인, 쓰시마 무역관을 거쳐 한반도에 상륙하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불과 300년 만에 우리 식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맵찔이인 저도 결국 이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니, 고추의 저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매운 음식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오늘 먹는 그 음식 한 입에 이런 긴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한 번쯤 떠올려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적 건강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V3MvgsjD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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